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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행신문] “아직도 인도네시아에서 할 일 많다”
등록일
2010-05-17 18:54:26
조회수
5,131
이름
클럽발리
내용

 

안녕하세요~

클럽발리 가족여러분~ㅎㅎ

 

오늘은 클럽발리 & 마타하리의 사장님~!!!

송 기 화 사장님의 이야기가 여행신문에 소개가 되었어요.

저희 사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살짝 들여다 보세요~~^ ^

 

 

 

 

----------------------------------------<여행신문 기사내용>----------------------------------------

 

“맡아서 하겠다”는 뜻의 ‘맡아서 하리(마타하리)’, “뭐든 다 하겠다”는 뜻의

사투리 발음 ‘마 다하리(마타하리)’ 등 마타하리의 별명은 많다.


인도네시아어로 ‘태양’을 뜻하는 마타하리는 인도네시아 발리지점에만 61명의 직원을 거느린

발리 대표 여행사라 일컬어도 무방하다.


지난 2004년 ‘발리에서 생긴일’이라는 드라마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발리는 태양만큼 뜨거웠고,

드라마 현지 주관사였던 마타하리는 그 만큼 더욱 바빴다. 단지‘발리’라는 여행지 자체에 대한 관심을 드높여

전체 수요가 늘기를 원했던 마타하리의 꿈 때문에 달린 길이었다. 고생만큼의 직접수혜는 없었지만,

송기화 사장은 마타하리 직원이 고생한 만큼 ‘발리’가 사랑 받은 좋은 계기였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그저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욱 잘하자’는 일념하나만으로

인도네시아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 덕에 이만한 사업체를 이루고 있지만

그래도 송기화 사장은 “이제야 인도네시아의 일부를 조금 아는 체 할 수 있는 정도”라며 겸손함을 지니고 있다.


20년전에 건너간 인도네시아, 이제는 인도네시아 하면 송 사장을 찾아달라고 할 법도 한데 말이다.

이러한 송기화 사장의 인도네시아 여정기는 한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물 한 모금 들이킬 순간마저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전하려한다.


<글=이소진 기자 sj@gtn.co.kr> <사진=김효정 기자 hyo@gtn.co.kr>

 

 

 


1993년 4월, 송기화 사장은 서울사무소의 상호를 ‘마타하리 랜드 서비스’로 교체하며 본격적으로 국내에서

상품판매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3년만에 발리에 위치한 본사가 한국법인을 설립하며 서울사무소로 옮겨오게 된다.

송 사장의 노력이 국내에서도 인정받아 명실공히 인도네시아 전문랜드로 다시금 발돋움하게 된 시기였다.


당시, 송 사장은 여행사로 출근해서 여행사에서 퇴근할 정도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 다니며 상품을 판매했다.

그 때는 그만큼 상품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내 놓은 상품을 여행사에서 흔쾌히 동조해주고 판매를 하겠다고

한 것에 대한 성취감에 힘든 줄 몰랐고, 마타하리의 앞날은 계속 태양이 떠 있을 줄 알았다.

 


가혹한 채찍질 뒤에 얻은‘겸손’

상품을 인정받고, 판매도 잘 되며 승승장구 사업이 번창할 때, 송기화 사장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다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세상 모든 것이 그의 것인 것만 같았다.

한창 상승세를 타던 그의 인생에 정점을 찍을 기회가 도래했다.

1996년 인도네시아의 제 2민항기 메르파티가 제 3국으로의 취항을 늘린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한국시장에서 발리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때라 기회는 적절했다.

이에 송기화 사장은 메르파티의 GSA를 획득했고 1997년 12월23일 인천∼발리 첫 취항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차였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했고, 끝없이 치닫던 교만한 마음을 잠재워 준 IMF가 떡 하니 송 사장 앞에 나타났다.

IMF가 터지자 모든 국내경기가 정체됐고, 따라서 메르파티의 취항은 취소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불어 거래 여행사들은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마타하리 역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송 사장은 “눈앞에서 희망이 사라져 버린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1998년5월 미국으로 6개월 간 여행을 떠났다”고 회상했다.

그는 IMF 시련을 통해 “세상 이치에 순응할 줄 아는 용기가 생겼고, 인생의 내리막길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깨달았다”며 “진심으로 욕심을 버리고 앞뒤 옆을 살피며 한발 한발 차례로 걸어나갈 줄 아는 융통성과 현명함을

갖게됐다”고 말했다. 바로 이 깨달음이 지금 현재 발리와 한국지사 외 자카르타(5명), 롬복(5명), 족자카르타(5명),

퍼스(3명) 등의 지사를 운영할 정도로 사업규모를 확장시키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송기화 사장이 인도네시아와 연을 맺게 된 1991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송기화 사장은 연극영화과 출신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당시 학교생활을 같이 했던 이들은 이재룡, 배종옥 등 이미 중견연기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스타들이다.

송기화 사장은 “만약 연극학도의 길을 걸었다면 이재룡과 견줄만한 연기자 송기화는 없었을 것”이라며

“대신 마타하리 송 사장이란 위치가 탄생하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인도네시아와 맺은 인연

분명 송 사장은 순수예술로서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자신이 없었다고 전했지만 아마도 송 사장에 내재된 끼와

인내심이 바로 마타하리 송기화를 만들어낸 원동력이 된 듯했다.

송 사장은 친구 때문에 한양여행사라는 공채시험에 응시하게 됐고, 당시 일간지에 크게 광고를 실을 만큼

대대적으로 구인광고를 내고 20명을 뽑는 여행사 공채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한양여행사에서 여행인의 꿈을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대대적으로 공채를 진행, 20명의 신입사원을 뽑아놓고 급여를 주지 않았고 결국 하나, 둘 떠났다.

그러나 송 사장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굳건히 버텼고, 동우항공여행사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후 그는 많은 것을 배우며 꿈을 키웠다.

3년차가 되던 해, 각자의 발전을 위해 한양여행사부터 동기였던 친구가 인도네시아는 기회의 땅이라며

삶의 터전을 옮길 것이라고 했고, 송 사장은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를 인도네시아와의 연으로 이끈 것은 당시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였다.

막상 결혼을 하려 하니 미국에서 제시한 조건은 살림을 꾸리기 어려웠다.

반면 인도네시아에서의 삶은 풍족하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게 신혼살림을 꾸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

인도네시아 행을 결정했다. 그렇게 송 사장은 인도네시아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생긴일

이민생활이라는 것이 단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각오했던 길이었지만, OP겸 가이드를 전전하며 생활을 꾸리기는 넉넉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자를 따를자는 없다고, 송 사장은 중국인 소유 ‘스티아투어’라는 곳에서 한국파트를

구성하면서 스카웃돼 자카르타에서 여행인 생활에 정착하게 됐다.


송기화 사장은 “스티아투어는 가루다와 유대관계가 깊어 250석 중 200석을 확보하고 있는 규모가 큰 여행사”라며

“랜드 업무를 배웠던 곳이고 자립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나의 인생의 진로가 결정된 중요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활에 정착시켜 준 고마웠던 여행사가 한국 파트너사와의 계약이 끝나자, 순식간에 실업자로 내몰았고,

당시 스티아투어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팀을 보낼 수 없었던 우리투어에서 송기화 사장에게

현지수배를 부탁했다. 스티아투어에서 일하면서 얻은 인맥으로 송 사장은 두려움 반으로 독립 수배를 시작했고

무사히 행사를 치뤘다. 이로 하여금 발리에서의 독립생활이 시작됐다.

 

 

그 때가 바로 일천구백구십일년,

우리여행사 발리지점을 개소하면서 마타하리의 모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발리에서 터전을 잡아 시작한 송기화 사장은 이제 인도네시아 전문랜드라 칭하여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업적을 이뤘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는 것이 진정한 프로세계

송 사장은 “아직도 인도네시아에 할 일이 많다”며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는 것이 프로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이유는 IMF 이후 다잡았던 사업이 다시 일어서면서 사업을 태국 지역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던 욕심이 성공치 못했기 때문이다. 낯선 지역으로의 사업확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송 사장은 이 때, “다시금 교만해지려 했더니 또 한번의 채찍질을 맞은 것 같았다”며 “이젠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알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2010년 그는 “이제는 두 번 다시 가혹한 채찍질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농담을 던지며

 

“앞으로의 마타하리는 지금 이 모습에서 더욱 강건해 질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송기화를 말하다


취미생활에 빠져드는 이유, 인생과 닮았기 때문


지금은 골프에 빠져 있지만 예전에는 낚시에 흥미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취미생활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인생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낚시는 기다림의 미학이 아니냐고 말하지만 송사장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혜안이 없으면 절대 좋은 고기를 낚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낚시다”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최상의 고기를 낚기 위해서는 미끼를 정성 들여 잘 만들어야 하며 풍향에 따른 물살의 흐름,

일조에 따른 움직임에 따라 자리 선정도 까다로워야 한다.

아무데나 낚시 바늘을 던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 어쩌다 운이 좋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이치.

현실과 닮지 않았는가”라고 의미를 던졌다.


골프 역시 송 사장에게 인생을 진리를 깨닫게 하고 있다.

송기화 사장은 “첫 번째 홀에서 잘 못 쳤다고 두 번째 홀도 열 여덟 번째 홀도 모두 망하는 것은 아니다.

굴곡이 얼마나 많은 게 골프라 했던가 결국 성패에 관계없이 한 홀 한 홀 열심히 치는 것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는 법이니 이 또한 인생과 많이 닮아있지 아니한가”라며 “바로 자기가 즐기고 있는 취미생활을 잘 살펴보면

자기 인생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그에 그렇게 열광하고 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인생을 위로하기에 나의 취미생활은 너무 훌륭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고향: 충청북도 음성

가족관계: 아내, 1남 1녀

1983년 동국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졸업

1988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1988년 동우항공 입사

1991년 PT.Ponda Tours&Travel

1995년 인도네시아 마타하리 법인설립

1996년 한국 마타하리 법인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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